새로운 질문이 도래했다. 과연 어디까지가 사물인 걸까. 만약 음식을 사물이라고 친다면, 생물도 사물이 될 것이다. 생물에서 파생된 것 중 하나가 음식이기 때문이다. 생물이 사물이 된다면 사람도 사물이 되고 만다. 사람은 생물이기 때문이다. 커피가 사물이라 가정한다면, 사람마저도 사물 중 하나가 되고 만다. 사람은 그 어떤 사물보다 분류가 세분화되어 있기에, 사람이 사물이 되는 것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꼴이 된다. 어디까지가 사물일까. 사물의 경계에 대한 고민을 갖기 이전에 '비둘기'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자연스럽게 생물을 하나의 사물로 본 것이다. 그러나 비둘기가 사물이라면 커피도 사물이 된다. 오늘 다루는 사물은 어쩌면 사물이 아닐지도 모를 커피이다.
커피는 대략 6회에서 9회의 가공을 거쳐 마시는 커피의 형태가 된다. 책상이나 모피 코트 같은 사물의 경우도 10회 미만의 가공을 거치고 나오는 것이기에 이와 비슷한 횟수를 거쳐 만들어진 생물의 가공 형태들은 모두 커피와 같은 애매한 위치에 놓인다. 사물은 본디 형식과 본질을 갖고 있는 물질적 무언가를 이야기한다고 정의된다. 이 정의라면 인간 혹은 사람까지도 당연히 사물이라 일컬을 수 있게 된다. 또한 사람이나 생물, 음식을 볼 때에 물건을 볼 때보다 강렬한 심상과 감각을 느낄 수 있기도 하다. 심상과 감각이 미신인지에 대해 탐구하는 입장에서 생물과 사람, 음식은 반증의 요소로 물건보다 더 쓸모 있다. 회화의 가장 기본이 정물화인 듯이 가장 관철하기 쉬운 것이 물건이고, 그 위에 인물화, 풍경화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 더 첨예한 심상을 뿜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나 생물, 음식을 사물이라고 칭하는 것은 이유 모를 불편함을 준다. 내가 마시는 커피가 사물이라면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집 앞을 지나가는 고양이가 사물이라면 그다지 귀여워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어쩌면 단어 '사물'은 어떤 것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거나 객관화시키는 어휘일지도 모르겠다.
사물은 정물보다 넓은 의미이고 어쩌면 생물보다 좁은 의미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긴 한데, 그 사물과 생물 사이의 미묘한 감각을 짚어내는 것이 관건으로 파악된다. 이와 관련한 책을 더 찾아봐야겠는데, 커피가 사물이라고 불린다면 너무 찝찝할 것 같다. 앞으로의 사물 보관소에 사용될 사물들을 위해서 이 문제는 신속히 결정되어야 할 문제로 인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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