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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

종이 가방 20.2.23.

   종이 가방은 선물을 받는 감각을 준다. 간단하게 말해 설레는 감각을 준다. 그러나 종이 가방은 일회용품의 하나로 간주되며 불편한 감각을 주기도 한다. 물론 어떤 일회용품보다 재활용 가능성이 뛰어나고, 한때 환경 운동의 일환으로 비닐봉지의 대체품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종이 가방도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지적받는 사물 중 하나로 자리 잡으며 불편한 감각을 주는 사물이 되었다. 그럼에도 종이 가방 안에 들어있는 것을 여는 행위는 선물을 여는 행위임에 설렘을 감출 수 없게 한다. 모든 선물은 보자기 혹은 종이 가방을 통해 전달된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선물 상자 자체를 주는 방식으로 전해진다. 내가 궁금한 점은 왜 종이 가방이 선물을 전달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지만 그 이유를 찾기 위한 글을 쓴다면 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다. 대신에 관객에게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개수의 감각을 평소 갖게 하는 사물을 어떻게 운용하면 좋을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다.

   사물이 한 가지의 감각만을 갖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사람 간의 관점차 때문이다. 이 점은 작업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매우 화가 나게 만드는 부분이다. 종이 가방은 왜 일회용품 대체품이었는데 갑자기 환경오염 모임에 들어가게 된 걸까. 그리고 난 왜 이렇게 그림을 못 그릴까. 하던 것을 그만두기로 한지 벌써 일 년이 넘어갔고 이제야 다시 뭔가를 시작하는 입장에서 과거의 내가 까마득히 먼 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은 참 큰 스트레스이다. 대견하기 위해 노력한 지난 10년이 어디로 사라진 건지 너무도 짜증 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자초했다. 환경을 없애고 그 감각들을 무디게 만들면 어떨까 하는 실험 정신이 이렇게 지치는 상황으로 이끈 것이다. 종이 가방과 같이 난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자리 잡고 만 것이다. 그렇게 다시금 과거의 감각을 곤두세우려 하면 첨예한 감각이 나를 찔러 또 다른 방식의 아픔을 선사한다. 글도 못 쓰고 그림도 못 그리고 첨예하지도 못하게 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괴로워하는 것뿐일까. 내가 심상과 그 친구들을 미신이라고 믿기 시작한 것은 2015년부터의 일로 감각을 배반하기 위해 감각을 키워내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는 감각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써온 몇 주간의 글이 진정 감각으로 써진 글이었는지 난 알질 못한다. 이 사실이 감각이 미신이라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지표로 사용된다면 너무 행복하겠지만, 10년간의 노력이 너무도 아쉽게 느껴질 때면, 그리고 감각하지 못함을 깨달을 때면 난 너무 가슴이 아프다. 찡찡댐은 이 정도로 끝내겠다. 어쨌든 일회용품의 대체품에서 일회용품이 된 종이 가방은 너무도 가슴 아픈 사물이다. 

   대체 언제쯤 그림을 잘 그리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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