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동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4월 6일 나는 이 활동이 유효한 활동인지에 대해 고민해 보기로 했었다. 그러나 다른 일들로 많이 바빴다. 요즘 아포칼립스 세대의 직장인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 스크립트를 만드느라 다른 고민을 할 시간이 없었다. 또 집 청소도 너무 할게 많았다. 그래서 어떠한 변화 없이 그냥 하던 대로 지칠 때까지 진행하기로 했다.
필통이 될 가능성을 가진 사물은 매우 많다. 필통을 제외하고, 수저통도 필통이 될 가능성이 있으며, 서랍장도 필통이 될 수 있고, 코트 주머니도 될 수 있고, 가방도 필통이 될 수 있다. 필기구 서너 개가 들어갈 공간만 된다면 대부분 필통이 될 수 있다. 초등학생 때 이후로 필통을 산 적이 없다. 사무실에서는 컵과 화분이 필통 역할을 하고 있고, 작업실에서는 서랍장이 필통 역할을 한다. 펜들은 가방 바닥에 모여있다. 필통은 실상 생산될 필요가 없는 사물이다.
필통이 생산되는 이유는 그 의미를 연명하기 위해서이다. 필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필통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사물들을 보고 필통의 역할을 수행하고있다고 할 수 없다. 필통이 없다면 필기구는 널브러뜨리거나, 뭉텅이로 모아놓는 방식으로만 수납할 수 있다. 둥글고 긴 필기구의 특징상 이러한 방식의 수납은 정돈된 상태가 아니다. 정돈될 수 없는 사물들이 필통을 통해 정돈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게 된다. 그다음 단계로 필통으로 간주하는 방식이 반영되어 한 공간에 널브러뜨려 놓거나, 뭉텅이로 모아놓은 것을 정돈된 상태로 인지할 수 있게 된다. 필통이 존재해 필기구는 정돈을 취한다. 즉, 필통은 추상명사가 될 가능성이 있다. 훗날 인류가 필통의 필요성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아, 필통의 생산이 중단된다면, 그때의 필통은 필기구 서너 개가 모여있는 형상을 지칭하는 추상명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필기구가 모여있는 것이 정리된 상태로 인지하는 우리의 지각 체계 속에서 필기구는 정돈이 안된 상태로 존재할 수 없는 사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절대 필통을 통해 필기구가 정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그렇게 간주하기로 한 것일 뿐이다. 필기구는 정리될 수 없다. 이불도 마찬가지이다. 간주함을 통해 우린 많은 불편한 점을 해결한다. 내 방이 내게 깨끗한 것도 내가 그렇게 간주하기로 한 것이다. 내방은 필통과 같은 원리로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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