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일하게 잘한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이 회화고, 나의 아웃풋이 될 수 있는 유일한 형태가 회화다. 그렇기에 캔버스는 나의 생계에서 필수적인 사물이다. 술을 그만 마시겠다는 말만큼 자주 하는 말이 그림을 그만 그리겠다는 말이다. 술처럼 캔버스 또한 내게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서 캔버스가 아닌 재료를 사용해봤는데 몸에 너무 해롭거나, 결과적으로 더 비싸지기만 했다.
회화는 사물에서 내게로 전달된 심상이 어떤 것인지를 시각적으로 설명하는 장치이다. 이를 위해 화가는 사물들의 심상을 꾸준히 축적해나가야 하고, 학습해야 한다. 회화만큼 미술에서 직설적으로 심상을 내리꽂는 장치는 없다. 회화가 시각 미술의 역사 전반에서 언제나 주인공을 맡아 왔고, 주인공으로써 가장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오며 가장 눈에 익은 형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회화는 어떠한 방식의 심상도 포용할 수 있는 장치가 되었다.
심상-미신론자로써 회화만큼 심상은 미신이라는 것을 잘 밝혀낼 수 있는 장치 또한 없다. 회화가 관객에게 도달하는 순간, 화가가 심은 심상은 파괴된다. 그림이 완성된 후로 회화에게 남는 것은 관객의 해석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회화는 관객의 수만큼 다양한 심상을 갖는다. 이때에 화가의 글은 관객에 의해 파생된 회화의 무한개의 심상에 한 지점을 향하는 방향성을 부여한다. 즉, 회화의 심상은 화가의 글을 만나기 전까지 방향성을 잃은 수많은 심상이라는 것이다.
이 상황은 어떻게 보면 글 없는 회화는 심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다. 사물에 보편적 심상이 존재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물에 심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때에 화가의 글은 그 방향성 잃은 심상들을 한 지점으로 모아준다. 다시 말해, 화가의 글이 회화에 보편적 해석을 부여하고, 그 해석을 관객은 보편적 심상으로 인지한다. 결국 회화는 심상이 없는 사물이며, 장치는 더더욱 아니다. 회화를 하나로 귀결시키는 글이야말로 전시에서의 사물에 해당하며, 장치에 해당한다.
즉, 캔버스가 없더라도, 회화 전시는 이뤄질 수 있다. 전시라는 관습을 위해 캔버스가 필요할 뿐인 것이다. 관습에 너무 많은 돈을 쓰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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