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통한다면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진다. 또한 신의 이름이라면 허용되는 것도 많다. 성직자의 덕목은 고립된 상황에서 얼마나 더 첨예한 감각을 끌어내는지에 있다고 판단한다. 오직 경전을 통해 세상을 읽을 수 있어야 하며, 그 모든 것이 수도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전통적인 성직자가 된다는 것은 시대를 타지 않는 불변 진리를 파악하고, 그것을 파악하느라 소홀했던 속세를 신이 내린 진리로 자연스럽게 구제하는 것에 있다. 제약은 첨예함을 낳는다. 인류는 어떻게든 새로운 자극을 갈망한다. 이는 성직자도 마찬가지로 갇혀 있는 성직자는 어떻게든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더 새로운 자극을 느끼길 갈망한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더 작고 미세한 감각들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그 감각은 신념이 되고, 정말 작아져 어느 순간 진리가 된다.
미시세계의 원리 하나를 파악하는 것은 세상의 전반 중 일부를 발견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정말 작은 감각 하나를 찾아내는 것은 인류의 진리를 바꿔놓는다. 그렇게 발견된 새로운 진리는 신의 이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정한 진리이기에 그 진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법칙이었음을 대중은 깨닫기 때문이다. 그 깨달음은 원래 존재하던 것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신의 이름을 잃는다. 누군가는 신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세계는 신의 이름을 훔칠 수 있으나, 신은 그 이름을 빌려주지 않아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절대 선과 절대 악의 구분을 없앤다. 즉, 신이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존재라면 우리가 신을 통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진리는 신의 이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미 신이 없어진 지 두 세기가 지난 현재, 신은 어째서 여전히 미술에 관여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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